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주소록을 보다보면 이제는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제법 볼 수 있다. 그런 걸 감안하면 250명 가량의 연락처 중 절반 이상은 지금 나와 거리가 멀어져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이들의 전화번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득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오르면서 그 사람을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오늘 점심시간에 싸이월드에 로긴했다가, 문득 그리운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이름이 떠올라서 사람찾기를 눌러보고 전화기를 찾아보고 떠오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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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금 세상에 내가 고등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왕따-이지메를 당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고등학교를 살아온 시절에는 그래도 아직 인간미 넘치는 분위기가 많았던지라 덕후포스를 풍기고 다녀도 친구들이 있었고, 반에서 왕따라던가 하는 것은 없었다. 물론 불량학생..이라기 보다는 날라리들은 있었고, 그들의 꼬붕들도 있었고, 착한 범생이도 있었고 재수없는 범생이도 있었고, 존재감 없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어울려서 한 반에서 수많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쌓아가고 졸업에 도달했다. 오늘 떠올랐던 친구는 굳이 분류하자면 착한 범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다 보니 내신 개판에 수능만 살짝 잘 봐 버려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대학에 턱걸이로 합격을 하게 되었다. 수능점수는 나보다 낮고 내신은 훨 좋았던 친구가 1차에 낼롬 붙었던 걸 생각하면 내가 학교 생활을 정말 막 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기야, 수능보기 10일 전에 [새로 나온 KOF'96을 하루에 한팀씩 엔딩을 보면 대학에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근거없는 썰을 풀어놓고 뜻이 통한(....) 친구녀석들과 정말로 하루에 한 팀씩 엔딩을 보고 수능에 도전했으니 뭐... 자업자득이랄까.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놓고 보니 내 주변에 남은 친구들의 대다수가 대학 시절 이후 사귄 친구들이고, 인터넷 커뮤니티의 오프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분명히 킹오파를 함께 하고 스파제로2를 함께 하고 TRPG를 함께 한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연락을 취해야 할 지 전혀 모르게 되어버렸다. 나 혼자 대학에 붙어서 대학생이 된 초여름에 이미 삐삐도 잘 안오게 되었긴 했지만, 이따금 떠올라서 안부 문자 하나 보내고 싶어도 도무지 연락을 취할 길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졸업앨범 뒤에 실린 전화번호를 뒤져서 시도할 만큼의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늘 인간관계가 중요하고, 사람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10년이라는 세월 뒤에 추억으로만 돌려버린 친구들이 떠오르면 과연 나는 올바로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아직 서로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채로 졸업해 버린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지금도 오만하지만, 정말로 모르는 것 투성이였던 시절 자기 깜냥으로 독설과 오만을 흩날리고 다녔던 여돼 덕후 고삐리였던 나는, 이제 추억속에서 새삼스레 따돌려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동창회나 동문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문득, 오프모임이 그리워지는 점심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