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어느 바다에서 건져올린건지 모를 손바닥만한 생선 한토막을 벗삼아 점심을 해결하고 사무실로 올라오니, 창을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에 봄인가 싶은 춘곤증이 새록새록 밀려온다. 초대받지 않은 잠은 어찌 이리 솔솔 몰려오는 걸까나..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함경북도 어딘가, 진달래꽃에 나오는 영변에 약산 근처라는 곳에서 나셔서 1년전쟁..이 아니라 한국전쟁에 즈음하여 남으로 내려오셔서 결국 고향을 다시 보지 못하시고 뇌줄중으로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아마 지금까지 31년간의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나를 초대해 준 사람은 우리 할머니였을 것이다.

 지금은 흔적도 남지 않은 나의 고향집, 신원동 모 번지. 전화선 때문에 KT의 인터넷만 겨우 들어오고 케이블 TV는 설치를 거부했던, 길 끝자락에 고즈넉히 서 있던, 20여년을 살아온 나의 고향집. 6개월도 채 되지 않았기에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 떠오르는 그 집의 안방 옆에는 우리 할머니의 방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회사를 마치고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면 할머니께서는 늘 잠깐 들어왔다 가거라 하고 나를 초대하셨다. 다리를 다치신 이후 거동이 불편하셨던 우리 할머니는, 전쟁이 끝난 후 없이 살았던 많은 미망인들이 그러했듯이 어렵게 많은 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오셨다고 한다. 소녀 시절에도 괄괄하셨다는 당신께서는 나이를 드셔도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셨고 돌아다니고 싶어하셨지만 불편한 다리 탓에 그러지 못하셨더랬다. 케이블이 안 들어오던 관계로 낮에는 라디오, 오후 늦게서부터야 TV를 벗삼에 세상과 소통하셨던 우리 할머니에게 누굴 닮았는지 싸돌아 다니는게 일인 큰 손주가 돌아오면 그게 그렇게 반가우셨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초대에 응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늦게 들어가게 되면 이미 주무시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밥을 먹고 씻고 어쩌고 하다보면 내 시간을 가지는게 그저 아쉬웠기 때문에. 그런 죄송스런 마음에 될 수 있으면 주전부리라도 사다가 안겨드리는 정도로 대신했었고, 쓰러지시기 전날에도 몇가지 먹거리를 전해 드리고 돌아섰던게 문득 기억이 난다.

 나이를 한두살씩 먹으면서, 누군가를 초대하고 누군가에게 초대받는다는 그 행위와 마음씀씀이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는 일이 많아진다. 결혼하는 모습을 보아주었으면 하는 초대, 돌아가신 슬픔을 달래주었으면 하는 초대, 아이의 성장을 축하해 주었으면 하는 초대,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키워주었으면 하는 초대... 그리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초대. 일상 속에서 언제나 당연히 있었기에 새롭지 않았던 매일 저녁 시간 잠깐의 그 친숙한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 내가,  문득 무척이나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고 눈시울을 붉히는 오늘이다. 말고 화창한 하늘빛이 눈을 찔러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꿈 속에서도 좀처럼 뵐 수 없는 우리 할머니의 초대가 그리워 눈과 코가 먹먹해지는 그런 오후가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