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계획에 없던 이사를 갑자기 하게 된 후, 여러가지로 쾌적한 환경 아래에 살게 되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넓어진 집과 방. 비록 온전한 내 것은 아닐지라도 당분간은 사용할 수 있는, 1천 2백만 서울 시민들이 그러하듯 한정된 시간의 '우리집'. 집이 넓어지고 방이 넓어진 것은 좋지만, 지난 3년간 포기하고 살았던 물건들을 넓어진 방에 옮겨 놓자니 그것 또한 만만치 않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넓어지긴 했으나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다른 무언가를 시작할 수 없는 짐 더미가 방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들을 정리하고 처리할 솔루션은 애석하게도 아직 내겐 없는 상황에서, 작은 서랍들을 정리하여 너저분한 작은 물건들을 치워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작한 서랍 정리 제 1탄은 목제 3단 서랍. 미묘한 크기지만 의외로 튼튼하고, 보기에도 나쁘지 않으며 제법 많은 물건을 수납하고 있었지만, 그게 언제부터의 물건들이 들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더랬다. 정말로 그 서랍을 다 꺼내어 뒤집기 전에는 말이지.

 서랍안에서는 많은 것이 나왔다. 정말 놀랄 정도로 많은 것들이. 96년쯤 소실되어버린 보드게임의 부품 하나, 칩 하나, 이게 왜 여기 따로 나와있는지 도대체 모르겠는 과학상자 3호의 큰 바퀴 2개, 플레이스테이션1 위주의 사이드 라벨 뭉텅이, 동봉엽서 뭉치, 플레이스테이션1 위주의 메모리카드 스티커, sfc판 제4차 수퍼로봇대전 매뉴얼, 동생의 2006년 홋카이도 생활의 수많은 흔적들, 2006년 일본 여행시의 내 흔적들, 오래된 메모가 가득한 수첩, 지금은 그 존재를 아는 사림이 있을까 싶은 zenkuman 고지라, 프론트미션3 제니스 액션 피규어... 그리고 잊어버리고 있던 몇 장의 편지와 연하장.

 최근에 영화로도 개봉되었던 상실의 시대 - 노르웨이의 숲은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는 소설인데, 그 이야기를 보면 거의 끄트머리에 히로인 나오코가 주인공 와타나베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한데 모아 태워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레이코 여사는 그 편지들은 너무 좋은 글들이었는데 왜 태우냐며 놀라지만, 나중에 이야기를 전해들은 와타나베도, 태우는 나오코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랍 한 구석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던-심지어는 이런 카드를 받았던가 싶을 정도로 기억에 남지 않았던 그 몇 장의 카드를 본 순간, 지난 15년간 이해할 수 없던 정신이상자 나오코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따금 연락과 카드를 주고 받는 사이였던 오랜 지기였던 그 사람은, 사실 나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와타나베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던 나오코의 죽음에 오열했고, 황량한 벌판과 해변에서 지독한 고독 속에 몸을 던졌고, 나오코는 결국 세상에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마치 잊어버리고 있던 일이 생각난 듯이' 목숨을 끊었던 것이리라.

 서랍 안의 부피를 차지할 뿐인, 지금은 그 마음이 어디로 갔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나열된 종이들을 꺼내어 정리하면서,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것 같은 '나비'를 어둠 속에서 손 끝으로 비벼 없애버리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렇게, 어떤 원인에서건 지나간 것들에 대해 미련없이 정리해 버릴 결심을 자유자래로 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그리고 진정 내가 원하는 것 이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뜨거움 주위에 차가움을 두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