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계절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실감케 하는 찬 공기를 코 끝으로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게 오늘 아침이었다. 새로 가을 정장을 꺼내어 놓고 세탁소에 맡기려는 오늘 저녁, 혹시 주머니에 잊어버리고 있던 지폐라도 없나 뒤적여 보던 중에 손 끝에 걸리는 종이가 있었다. 직감적으로 지폐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꺼내어 보니, 어딘가의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한 마트의 영수증이다. 아무렇게나 대충 절반이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날짜는 대략 13개월 전, 그녀와 단 둘이 어딘가로 놀러가면서 장을 본 간소한 내용의 영수증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시간의 밀도가 낮아진다는 친구 녀석의 말이 이 영수증 한 장으로 온전히 실감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게 벌써 1년 전인가. 처음으로 단 둘이서 멀리 나들이를 다녀온 그 날이. 둘에게는 새로운 도전의 하나이기도 했고, 당시 약간 트러블이 있던 직후라 약간은 서먹해진 둘 사이에 뭔가 이벤트를 만들어서 기분전환을 해보고자 했던 나들이였다. 결론적으로 어느 정도는 기분전환도 되었고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 나들이가 어떠한 큰 전환점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영수증을 잠시 바라보며 그 날을 떠올려보다가, 결국 영수증을 어떻게 버리지도 못하고 책상 위에 던져놓고 세탁소를 향했다. 날씨가 바뀐 것을 느낀게 나 혼자만이 아닌 탓일까, 뭔가 일이 많아 보이는 세탁소 사장님에게 클리닝을 부탁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제로 콜라를 샀다. 다이어트니 건강이니 해도 내 입맛에는 콜라가 제일이라, 다소 김빠진 맛이긴 하지만 제로콜라는 냉장고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어딜가나 음료를 마실 일이 있을 때 제로콜라를 집어드는 것도 언젠가부터로군.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아이튠즈로 음악을 틀어놓고 이제부터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을 해 본다. 저녁을 먹어야 겠지만 어쩐지 아까 그 영수증을 보고 나니 딱히 입맛이 없다. 배는 고픈데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그 행동이 하기 싫다. 노래 두 곡이 끝나도록 딱히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침대에 널부러져 있자니 잠이 오려고 한다. 샤워도 안 했고 시간도 이르고 벌써 잠들기엔 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될대로 되라지... 하는 생각에 몸을 맡겨 볼까 싶어진다.

 잠이 살풋 들려는 찰나, 핸드폰이 진동을 올린다. 힐끗 화면을 보니 당장 받지 않아도 별 일이 없을 것 같은 이의 이름이 뜬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받고 싶지 않아요. 시끄러운 벨소리를 차라리 즐기며 잠을 청하려니 이윽고 벨소리가 멈추고 아이튠즈가 들려주는 네번째의 곡이 끝난다. 언제 받았는지도 모르겠는, 모르는 목소리의 모르는 노래가 쿵짝쿵짝 시작된다.

 문득, 오늘 들은 소리 중 가장 오늘을 대표하는 소리가 무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까 발견했던 13개월 전의 영수증을 꺼내며 들었던, 그 '바스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 '바스락'소리와 같이 어디에도 갈 수 없고, 너무 짧으며, 접혀있는 긴 내용이 아무래도 좋은 내용이었던 것처럼 잠 속으로 스며들어 이내 사라진다. 살짝 배가 고픈 것 같지만, 정말 고파지면 눈이 떠지겠지. 지금은 일단 자자. 그리고 잠이 바스락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