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그건 어느 가을 날이었다. 

꼭 오늘과 같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아래서, 단어 그대로의 느낌을 가진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서, 조금은 햇살이 따가운 것 같기도 한, 그런 매우 맑은 날이었다. 나는 내 방 앞에 있는 을씨년스러운 마당에 나가, 색이 바래고 벗겨진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낡은 파라솔이 만드는 그림자 아래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아마도 언제나의 회색 반바지와 회색 반팔티셔츠를 입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가면 언제나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던 하얀 개 진구의 등을 발로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낡은 댄스댄스댄스를 집어들고 언제나처럼 아무 페이지나 펼쳤던 것 같다.


 그건 내게 있어 습관적인 취미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늘 동경하던 풍경을 스스로 연출하는 재미와 같은 것이었다. 진구는 내가 좀 적극적으로 만져주고 놀아주길 원했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따뜻한 햇살과 파란 하늘 아래서 하얀 몸을 땅바닥에 붙이고, 내가 힘을 주어 살짝 얹은 발바닥의 감촉을 등으로 느끼며 이내 눈을 감았다. 나는 그 발을 슬리퍼와 의자와 내 허벅지와 진구의 등으로 한 번 씩 옮겨가며, 아무 페이지의 아무 문장부터 시간과 마음이 내키는대로 읽어내려갔다. 

 모든 것이 낡았더랬다.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내 몸뚱이는 나름 젊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손에 들고 있는 댄스댄스댄스는 10대 끝자락에 구입한 빛바랜 표지였고, 의자도, 파라솔도, 테이블도, 보수라곤 한 적 없는 을씨년스러운 시멘트 바닥은 15년은 족히 흐른 것 같았다. 그런 낡은 풍경 속에 앉아, 하늘과 바람과 햇살과 개의 등을 감촉으로 느끼며 읽는 낡았지만 좋아하는 문장을 읽은 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지금은 그로부터 또 10년에는 좀 모자란 시간이 흘렀고, 다시는 그 풍경 속에서 그 개의 등을 발로 쓰다듬을 일은 없게 되었지만 그 풍경은 정취로 남아 오늘 같은 날에 바람이 코끝을 스치면 냄새처럼 이끌려 머릿 속에 떠오른다. 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어쩌면 다시는 찾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ㅅㅇ동 212번지 내 방 앞마당의 그 풍경이.

 그래도, 때가 되면 하늘은 그 푸른 빛으로 세상을 감싸고, 햇살은 눈과 피부를 살짝 찌르고, 바람은 이젠 늦어버린 반팔 소매를 살짝 때리며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조금 쓸쓸해지지만, 그래도 눈꼬리로 빙그레 웃는다.

 그렇군. 가을이 오려고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