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삼십분 늦은 퇴근과 이해할 수 없는 교통체증 덕분에, 차에서 내렸을 때는 상당한 허기가 느껴졌다. 무엇을 해먹어야 하나...하는 심정으로 집에 돌아와보니, 아무래도 설거지를 먼저 해치우지 않으면 뭔가 만들어 먹기 좀 불편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왜 어제의 나는 조금 더 부지런하지 않았냐는 짜증을 스스로에게 부려보지만, 기억 속 어딘가에서 고개를 돌려 쨰려보는 어제의 나는 빨래를 정리하지 않았냐며 패악질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씁, 어쩔 수 없지. 보일러를 켜고 싱크대 앞에 서서 수세미를 들었다. 차근차근 그릇을 정리하며 그릇을 부시고 있자니, 벌써 수일 전에 파스타를 만들어먹고 내팽개쳐둔 프라이팬도 씻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인덕션에서 처참한 몰골의 프라이팬 1호를 집어들었다. 따끈한 물에 살짝 불려 팬을 씻고 수돗물에 헹구어보니, 어느틈에 생겼을까 싶은 상처들이 보였다. 코팅이 벗겨진 팬은 건강을 해치는 법인지라, 프라이팬 1호는 이제 퇴역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팬의 퇴역은 아무튼 해야할 일이고, 설거지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이건 또 납득이 가지 않는 시간이다. 허기는 오히려 약간 사라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또 적당히 주전부리로 때우면 또 속이 쓰려질 터... 찬장을 열고, 뭔가 먹어치워야 할 것이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상미기간이 두달 쯤 지난, 후쿠오카에 놀러갔다온 누군가가 선물로 준 이치란의 인스턴트라멘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오늘도 라면이다. ...라멘이지만.

 

 갓 씻은 작은 냄비에 물을 다시 받고 인덕션에 불을 올렸다. 파도 없고 양파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라멘을 끓인다면, 결국 남은 선택지는 달걀 프라이 아니겠는가. 어렸을 적 들었던 할머니의 말투를 빌려, 겨란을 부쳐먹자~며 냉장고를 열어 사놓은지 한달쯤 되어가는 것 같은 겨란을 하나 집어들었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뭐든지 천년만년이다. 어휴. 물이 끓어오르는 걸 보고 라멘을 뜯어, 면을 조심스레 집어넣는다. 그리고 겨란을 부칠 프라이팬 2호를 꺼내는데...


 ...2호에도 상처가... 아아, 나는 이렇게 프라이팬들을 혹사시키는 이카리 겐도같은 몹쓸 인간이었던가. 2호도 퇴역을 결정했다면 해야 할 말은 하나 뿐. 대역은 얼마든지 있다. 결국 2호와 같은 날 1+1으로 들여와서 한 번도 쓰지 않은 예비호를 꺼낼 차례다. 더운 물로 가볍게 헹구고 물기와 먼지를 닦아 약간의 기름과 함께 인덕션에 올렸다. 면이 적당히 풀어진 것을 확인하고 휘휘 젓고, 불을 끈다. 2종류의 스프를 넣고 다시 휘휘 저어 라멘을 완성해 가면서, 왼손으로 팬의 기름이 도는 것을 확인한다.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한손으로 달걀을 깨서 우아하게 팬에 떨어뜨리자, 역시 새 팬 답게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치익- 익어간다. 겨란을 부치는 순조로운 즐거움을 꽤나 오랫만에 느껴보는 그런 기분. 달걀이 익어가는 걸 즐겁게 귀로 가늠하며, 고양이 그릇에 라멘을 옮기고, 비법 스프를 뿌린다. 스프와 라멘 봉지를 뒷처리 한 후, 여수김부각을 한조각 꺼내 아작거린다. 겨란이 다 부쳐진 것 같다. 팬을 집어들고 살짝 기울이자, 역시나 새 팬의 강력한 코팅 위에서 아름다운 달걀프라이가 미끄러진다. 슬쩍 팬을 더 기울여, 라멘 위에 올린다. 

 ...이렇게, 설거지를 하고 프라이팬 2개를 버리기로 결정하고, 상미기간이 지나고 유통기한이 의심스러운 라멘을 끓여먹었다는 이야기. 그나저나, 프라이팬 2개는... 어떻게 버려야 하지? 아파트 생활은 종종 어려운 문제가 튀어나온단 말이야.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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