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하라주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비스역. 개찰구를 나와서 가든 플레이스 방향으로 나오니 이동보도(스카이 뭐였는데...)가 등장하더라. 공항이나 종로3가 정도에서만 구경했던 이동보도가 제법 길게 이어진 길을 나름 속보로 성큼성큼 걸어서 몇개인가를 통과하니 가든플레이스가 나왔다. 가든플레이스는 코엑스몰을 연상하게 하는 쇼핑 거리였다. 가든 플레이스 한가운데에 그렇게 크지 않은 광장이 있었고 광장 가장자리에 벤치가 많이있어서 부근의 직장인들이 이 곳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시거나 하고 있었다. 건물은 지하와 지상에 의류나 장신구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잔뜩 위치해 있었고,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동생에게 추천받은 지하 2층 푸드 코트의 라멘야(라면집) 만류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만류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뒤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라기보다, 내가 도착했던 시간에 영업을 개시한 가게가 만류 뿐이기도 했었고. 삿포로식 미소라멘이 주력인 듯한 느낌이었는데, 동생이 초강추했던 미소라멘 대신 날이 더웠던 관계로 냉미소에 챠슈를 추가해서 먹기로 했었다. ..결코 이 전날 밤에 네이버블로거 히형님(가명, 여, 18세)의 냉라멘 포스팅 때문에 골랐던 것은 아..아니었다. 믿어달라. 미소라면을 차게 먹다 보니 좀 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생각외로 느끼하거나 기름기 때문에 식감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짜긴 하지만 챠슈와 국물 자체는 맛깔스러웠고, 동생의 추천대로 따뜻하게 먹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기대감도 품을 정도였다.
날이 더웠던데다 상당한 거리를 걸었던 탓에 배가 고팠던지라 게눈 감추듯 라멘을 먹어치우고, 지나치게 깨끗하게 비워버린 그릇을 바라보며 잠시 겸연쩍음을 즐기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 시작된 듯, 등산객(?)부터 샐러리맨, 노무자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조금씩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내가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문을 닫고 있던 이웃의 가게들도 하나둘 문을 열고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뒤로하고 내려왔던 에스컬레이터에 다시 올라 가든플레이스로 올라갔다. 밥을 먹었으니 후식을 먹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 에비스 맥주 본사의 에비스 맥주 기념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광장으로 나와, 광장을 가로질러 백화점 건물로 들어가 그대로 백화점을 통과하면 에비스 맥주 기념관의 입구를 만날 수 있었다.
라멘가게의 시원한 공기와 가든플레이스의 더운 공기, 백화점 건물의 차가운 공기와 에비스 맥주 기념관 입구의 더운 공기를 연속으로 통과한 탓인지 목이 마르던 참에 찾아들어간 맥주 기념관은 그저 반갑기만 할 따름이었다. 2년전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들렀을 때 느꼈던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성격으로 지어진 작은 분점이라는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안내 데스크와 관련상품 판매점이 위치한 1층에서 간단한 안내서를 챙기고 계단을 내려서자 한쪽 구석에는 삿포로의 것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 같은 에비스 맥주의 역사와 발매되었던 제품들이 전시된 부스가 있었고, 얼굴을 내미는 판은 아니었지만 거대한 맥주캔의 모형이 놓여있어많은 사람들이 모형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내가 갔을 때 그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대부분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 으음...
맥주캔 모형 뒷편의 통로를 따라 내려가니, 어둡지만 편안한 분위기의 바가 나왔다. 삿포로 때처럼 자판기에 금액을 투입하고 원하는 맥주 티켓을 구입하여 바텐더에게 맥주를 받아오는 구조의 바였다. 스킨헤드와 턱수염이라는 2인조 중년 바텐더의 능숙한 손놀림을 통해 에비스 맥주 4종 비교 세트(쿠라베 셋트)를 건네받고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선글래스를 벗고 맥주를 마셨다. 삿포로의 것은 개화기 당시의 맛을 재현한 맥주를 포함한 3종 세트였는데, 이 곳 에비스의 것은 각자 다른 풍미를 가진 4종류의 에비스 맥주를 맛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삿포로에서 먹어 보았던 효모가 든 맥주 크래커를 안주 삼아 차가운 맥주를 천천히 감상하고 있자니 어두운 바의 분위기와 함께 잠시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지친 다리도 쉬고 소화도 시켜가며, 근처 테이블을 구경하고 있자니 돌아가신 할머니보다 더 연세가 들어보이는 백발의 할머님 두 분이서 사이좋게 맥주를 마시는 풍경,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를 나누는 모습, 한 명의 등발 좋은 청년이 뭔가 문고본 소설을 읽으며 맥주를 연거푸 몇 잔이고 들이키는 모습, 여자들끼리 혹은 몇쌍의 남녀-모두 한국인이었다-가 자리를 잡고 DSLR로 조금은 소란스레 사진을 찍으며 분위기를 즐기는 모습 등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돌아다니는 여행이란 완급조절을 혼자서 알아서 해야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또 자유로움과 통하기도 하며, 이렇게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는 여유 또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술이 약한 편이라 작은 잔에 들었다고는 해도 4잔의 맥주를 마시고 나니 조금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호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더운 날에는 맥주 따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법이라 했다. 어둡고 시원한 지하에서 맥주를 즐기는 망중한도 슬슬 끝낼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빈 맥주 잔과 쟁반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다시 선글래스를 끼고 취기를 날려보내줄 더위가 장악하고 있는 거리로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긴자를 거쳐 아사쿠사였다.
ㄹ. 오후 A - 긴자에 잠시 들르다.
에비스에 올 때는 JR로 왔지만, 아사쿠사를 가기 위해 선택한 루트는 다시 지하철이었다. 사실 교토에 갔었을 때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풍경도 볼 수 있고 여유도 있었던 기억이 나서 루트를 선택할 때 동생과 상의를 했었지만 도쿄는 버스로 돌아다니기에는 부적절한 동네라는 답변이 돌아왔었다.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동생의 의견을 존중하여, 이번에는 아침에 메이지신궁을 갈 때 탔던 히비야선 에비스역으로 향했다. JR 에비스 역과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서 JR역사를 아예 빠져나와 다시 지하철 입구를 찾아 들어가야만 했다. 후덥지근하고 먼지냄새 가득한-그래서 그만큼 익숙한-지하철역에서 지하철에 올라 긴자역을 향했다. 거리가 조금 있었던지라 시간도 조금 걸렸지만 비교적 편하고 간단하게 긴자역에 내릴 수 있었다.
원래는 아사쿠사로 가는 긴자선을 바로 갈아타야겠지만 지인 YUIRIN 형님의 부탁으로 일본 내수용 해혼 디카의 수리를 알아보고자 긴자역 부근에 있는 해혼 A/S 센터를 찾아가 보기 위해서 긴자역에서 내린 것이다. 동생의 집에 프린터가 없어 PSP에 사진파일로 넣은 지도를 보며 A/S 센터를 찾아가 보았다. 다행히 지도에 표시된블럭 그대로 통과하자 이내 해혼 사진 갤러리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사진 촬영이 금지된 갤러리에 잠시 들러 해혼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라는 사진 작품들을 조금 둘러보고 출입문 옆의 통로를 통해 A/S 센터를 찾아갈 수 있었다. 통로에 바로 A/S 센터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해혼의 제품 전시장이 있었는데, 그 곳의 직원에게 A/S 센터를 문의하자 반대쪽 출입문을 나가서 옆의 문을 이용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A/S 센터가 있다는 설명을 듣고 찾아갈 수 있었다.
A/S 센터는 과연 깨끗했고 평일 낮 시간인 탓인지 손님이 한명도 없는 한산한 분위기였다. CCD 청소 킷에 대한 설명을 하는 동영상이 무한 반복되는 디스플레이어가 놓여있는 가운데 인상좋게 생긴 아저씨 한명이 안내대에 서 있었다. YUIRIN 형님이 맡긴 카메라를 꺼내어 상태를 설명하고 문의하자, 5분 쯤 카메라를 점검한 후 내부 센서의 불량이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1주일 정도의 수리기간이 필요하고 요금은 7,800엔(!) 정도가 든다고 했다. A/S 요금 규정은 규칙이 있어서, 고장 정도와 필요한 부품의 종류에 따라 7,800엔-9,800엔-11,000엔(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정도 규모의 금액이었다) 정도의 수리비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요금도 생각보다 높았고 시간도 오래걸렸던지라 사정을 설명하고 카메라를 돌려받았다. 직원 아저씨는 아키하바라 부근의 QR 센터를 설명해주며 기간이 문제라면 이곳을 찾아가서 하루에 해결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들려주기도 했지만, 고맙다고만 하고 센터를 나왔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생각지 못했던 해혼 갤러리도 잠시나마 구경할 수 있었고, 긴자역에 전시되어 있던 스누피 관련 상품들도 본 것을 소득이라 여기고 다시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이번 일본행에서 가장 기대했었고 가장 실망했던 아사쿠사를 향해 갈 차례였다. --------------------------------------------------------------------------------------------------- 상상 이상으로 글이 길어지고 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적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이 쪽이 나중에 읽을 때 더 떠올리기 쉬운 관계루다가... 아무튼, 16일 오후 2로 이어진다. ...16일 3은 나오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