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함박눈을 맞으며

이야기2006. 12. 17. 18:32

몇 번인가 눈이 왔었다. 무척이나 약한 기세로 잠깐, 진눈깨비로 잠시, 싸락눈으로 조금. 그렇게 올 겨울의 눈은 나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나는 그 인사에 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대신 전해듣기도 하면서 12월의 중간을 훌쩍 넘기는 중이었다. 어젯밤은 내가 몸담고 있는 서바이벌 팀 "BLACK LAGOON"의 송년모임이었다. 팀장님의 집에 모여 보드게임과 비디오게임, 음주 잡담을 즐기며 오랫만에 한껏 늘어진 분위기의 모임을 가졌더랬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다, 바람개비같은 마지막 멤버가 등장했을 때 눈이 마구 내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밖이 잘 보이지 않는 구조와, 이미 너무 어두워진 저녁이었던지라 어떻게 눈이 내리는지 알지 못한채 술잔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딘지 무척 그리운 느낌이 가득한 시간이 즐겁게 흐르고, 비디오 게임을 하는 몇명과 체스를 두는 몇명으로 나뉘어 이야기가 잦아들 때 즈음, 프습을 가방에 넣고 잠시 거리로 나섰다. 눈이 내리는 길을 걸어보고 싶은 기분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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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함박눈이 마구 쏟아지는 저녁의 화양리는 학생시절의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급한 마음에 조금 일찍 박차고 나온 학교를 뒤로 한지 3년. 학교를 미워하기도 하고 한때의 둥지를 부정하려하기도 했던 시간이 흐른 뒤 학교에서는 맛본적이 없는 것만 같은 눈발속의 심야를 걸으며 그리운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쉴세없이 얼굴에 떨어지고 입술에 키스를 던지는 눈발들을 맞으며 오랫만의 거리를 누비는 기분은 매우 좋은 것이었다. 나는 상념 속에 살아가는 것이 좋은 비현실적인 인간이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가슴의 고동에 귀를 접는 인간이다. 모임에서 잠시 벗어나 또다른 의미의 그리운 거리를 조심조심 걸어다니는 재미를 알아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엄청난 눈발이 전해주는 차가운 감촉의 상쾌함은 분명 어젯밤에 나를 얼마간 안아주었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종강총회와 송년회가 나란해서 이젠 내게 너무 먼 학교를 가까이했던 엊그제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해 준, 행복하리만치 고마운 눈이었다. 그 눈발 속에서 거닐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다른 의미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분명 인생은 타이밍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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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맞고 쏘다니다 모임에 돌아갔을 때, 분위기는 조금 잦아들어 있었지만 놀이는 이어지고 있었다. 함박눈 속에 젖어있던 시간이 끝나고 다시 조금전의 즐거움에 다이브할 시간이었다. 현실로 돌아가기엔 아직도 시간은 남아 있었다. 나는, 그저 즐길 뿐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이렇게 감상에 잔뜩 젖어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이 무척 아쉬울 만큼. 나는, 사람들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좋다. 팀 블랙라군의 멤버들이, 세종대학교 한손의 지기들이, 월드게임패밀리 가족들이, 라야의 비즈빠들이, 그리고 지금 얼른 기억이 안나서 못적은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그들의 어젯밤이 포근한 함박눈의 축복과 함께 상쾌하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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