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실향민

이야기2008. 10. 28. 22:40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인 분들이 아직 많은 대한민국에서, 재개발로 인해 오랫동안 살아온 동네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실향민이라고 말하긴 거창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내 기분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실향민이라는 말이 딱 적절하다고 본다.

 휴전선 너머 이북이 고향인 우리 아부지도 그렇고, 결국 고향에 다시 찾아가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그 분들의 자식인 나도 비슷한 감상을 겪는게 어색한 것은 끼워맞춘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지만, 25년간 살아온 집을 떠나면서 짐을 쉽게 꺼내기 위해 약간의 파괴를 자행한 것이 독하게 맘먹고 연을 끊어내는 행동이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가마성운에서 온 침략자 케로로 중사의 일갈에 따르면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질러두고 한동안은 즐기고 가까이 두었던 것들을 막상 움직여야할 순간이 되자 주저없이 던져버리는 자신을 발견했을 땐 스스로에게 경악하기도 했고, 꺼내도꺼내도 나오는 미개봉 건프라 박스에는 다른 의미로 질려버리기도 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아이템들이 과연 격언 그대로 여기저기서 기어나왔고, 나름 손 닿는 곳에 잘 두었던 물건들은 냉정한 가치판단에 의해 방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적인 가치판단이 나중에 어떤 감상으로 다가올런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의 그런 모습에 많은 반성을 하던 순간이 이어졌더랬다.

 움직이는 걸 싫어하고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며 이사라는 행위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지금도 마음이 영 안정되지 않는다.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익숙한 풍경은 이제 찾아갈 일 없는 곳이 되었고, 그곳의 하늘에 떠오르던 오리온 자리도,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던 앵두꽃도, 가을이 깊어지면 구린내와 함께 떨어져 내리던 은행 열매들도, 해캄과 이끼가 잔뜩 끼었지만 고맙게도 샘 솟았던 우물물도, 귀가와 함께 닫던 안채의 나무 대문도, 그리고 온갖 덕후아이템들이 내려다 보던 내 방의 내 이부자리도, 이젠 다시 만날 수 없는 추억 속의 풍경으로만 남게 되어 버렸다.

 매 순간 살아가는 일각의 시간이 모두 곧 과거로 화하고, 그 과거를 딛고 밟으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던 환경의 침강을 그저 잊어야할 과거로만 돌리기엔 너무 많은 기억과 추억과 상념이 그 풍경안에, 그 환경안에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나는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겠지만, 그 때가 올 때까지 좀 방황해야 할 것 같다. 살던 집을 뒤로하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어둠 속의 풍경이 되는 것을 바라보았던 며칠 전의 시간이, 차라리 소중했던 것만 같은 이 기분을 끌어안은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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