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허영만 화백님의 걸작 4연작인 타짜 시리즈 중 타짜 3부였던가... 포커로 종목을 바꾸고 짝귀의 아들과 무슨 스님(타짜 1부 원작 만화에서 고니와 짝귀가 만난 절의 주지)의 아들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그 작품의 최종전 바로 전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도일출이 이런 대사를 한다. '요즘 세상에 물건 아닌 사람 있어?'

 

 고도 자본주의 사회. 우리는 정과 오지랍이 뒤섞여 아름답게 흐르는 대한민국에서 서로가 물건이 된 줄 모르는지 외면하는지 헷갈려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선두주자 미국은 이미 40년 전부터 그러한 생각을 예술의 영역으로 적극 도입하여, 지금은 팝아트라는 장르를 확립하며 엔디 워홀과 같은 대가를 배출하며 순수 예술의 영역에 들어섰다. 모든 것이 물건, 물건을 감싼 포장. 인간의 존엄성을 품은 자아는 물건이 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면과 생활양식은 포장이 되어 발달한 문명 안에서 인간은 고독해져간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사람은 각각 개성을 품고 드러내고 부대끼고 또 숨겨가며 살아간다. 어쩐지, 이 전시회를 보고 나서 나오는 내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가득차 있었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대체로 전위적이고 추상적이며, 코카콜라 또는 펩시콜라의 로고 등이 심심찮게 보이기도 하고, 도대체 이게 왜 예술작품인가 싶은 것들이 많았다. 사실 나도 순수예술 영역에는 조예가 없는지라 오디오의 설명이 없었다면 뭐냐... 싶은 게 한 가득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느끼고 있는 모든 장르의 예술이 요구하는 기본 소양 - 대화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작품이 전달하려는 의도를 받아들이거나 토론하거나 반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오브제object라는 키워드로 대변되는 미국미술이라는 분야에 포함되어 있는 몰개성 속의 개성과 예술가 개개인이 느끼고 표현한 감성, 그리고 그것을 보고 받아들임에 있어 당돌함을 느끼게 하는 부분과 자본주의사회, 대량생산 산업사회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겐 당연하고 친숙한 부분이 공존하고 있는 전시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충분히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감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뭐라고 잘난 척 떠들어 봐도, 우리는 모두 인간성을 품은 사람이고, 아무리 사회가 산업화되고 사람이 물건 취급 당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과 개성, 그리고 정을 느끼고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또한, 규격에 미달되는 물건이 되고는 싶지 않다는 욕심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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