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불리 점심을 먹고 회사 건물로 돌아와, 블라인드로 꼭꼭 가려진 사무실 내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잠시 방화벽이 일부 해제되는 네트워크를 찾아 바삐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이내 귀찮아져 짐짓 의자를 뒤로 제껴본다. 어제도 화창한 날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기온이 차게 느껴질 정도로 날이 흐리다. 흐린 하늘은 기분을 가라앉히고, 최근들어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일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날아다니면 가라앉은 기분은 반죽이 되고 떡이 된다.
보기보다 낭만을 좋아하는지라, 여러가지 처한 상황에서 비련의 주인공 혹은 의지의 한국인을 연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건 즐겨보고자 하는 사상을 베이스로 한 나만의 일인극. 관객도 배우도 감독도 비평가도 나 뿐인 연극. 유쾌하고 업된 기분으로 전했던 몇마디에 신랄한 비판이 전해지자, 연극은 망하고 극장은 문을 닫는다. 애초에 쓸데없는 시나리오를 어울리지 않는 배우가 같잖은 감독 때문에 기분 좋은 척 연기한 것이 잘못이었다. 관객이 나 하나였으면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몇명 되었던 모양이다.
내 나름대로, 챙긴다고 챙겼다. 신경 쓴다고 썼다. 선을 넘지 않도록, 특기인 선긋기와 벽쌓기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가며, 이만하면 사이좋게 지낸다고 저울질하며 연락을 이어왔다. 최저치로 잡은 기대와 지극히 낮았던 상한선은 역시 나만의 생각이었고, 애초에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하듯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최고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같잖게 오지랍 넓은 척 해봐야, 나이값 못한다는 소리만 들을 뿐이다. 아직 서른도 안되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이미 겉보기 등급은 아저씨인데다 발악해봐야 아저씨는 아저씨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으로 최악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는 주제에 즐겁고 밝은 척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나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실망과 배신감에 휩싸여 적당히 화가 난 상태로 쉽게 짜증을 느끼기 시작한지 조금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날이 흐리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았던 그날 오후도 날은 흐렸었지만, 비는 오지 않아도 하늘이 어두운 요 며칠의 흐린 날씨가 내 기분을 끌어올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역시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이젠 누구한테 살갑게 연락하기도 겁나고, 괜히 친한척 하기도 겁난다. 사실 난 어느 정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라는 결론이 자꾸 나와서 짜증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