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온지 1년도 넘은 게임이지만, 뒤늦게 클리어하게 되었다. 이걸 구할 때 동생녀석을 죽도록 닥달해 놓고 정작 초반 끝나갈 때 쯤 개점휴업 상태로 내버려 둔 덕분에 동생녀석에세 욕 먹을 구실의 하나가 되기도 했었던 게임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팔 골절 중에 클려에 도전해 보고자 수퍼로봇대전 전용 컨트롤러(왼손만으로 플레이가능한 패드)를 구입했었지만 NDS용 파판3 노가다에 빠져 포기하기도 하여 더욱 욕을 먹기도 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다시 의욕이 생겨 다이렉트로 짬 날 때마다 진행하여 120시간 이상의 플레이타임으로 엔딩을 보았다. 그 감상을 몇 가지 적어보면...
- 재밌다!!
게임의 진행 방식이나 껍데기가 기존의 파판,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는 10(11은 해보지를 못한데다 장르가 다르므로 패스)과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게임을 약간 진행해 보면 이거 영락없는 파이널 판타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놓았다. 당연히, 게임 자체가 무척이나 재미있어서 스토리의 흐름과 캐릭터의 성장 중 어느 한쪽에 무게를 싣는 순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는 놓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 무섭다...
재밌다는 감상에 이어서, RPG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가다나 와리가리가 필요한 시점에 도달하게 되면, 이 게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과도하게 돌아가 있는 시계 바늘을 보며 놀라고, 화면 속의 캐릭터들의 성장이 느끼게 해 주는 흡족함에 소스라친다. 이 게임 파판12는 무서운 게임이다.
- 도구를 사용하는 짐승, 인간.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침팬지들도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흰개미집을 부순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만 인간은 생산-식사-작업-생식 모든 것에 도구를 사용하고 시도한다는 점이 다르다. 파판12에 등장하는 6명(게스트 캐릭터-NPC는 제외)이 장비하고 장착하고 휘두르고 던지고 쏴대는 무기와 방어구들을 위해서 돈을 벌고, 시간을 들이고, 교역을 하고, 이에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인터넷과 서적을 뒤져 수집하고 공부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PS2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즐거움을 찾기 위해 또 다른 도구들을 이용하고, 그 결과 얻게 된 게임 속의 도구들을 이용해 게임속의 몬스터들을 쳐죽여 나가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희열을 느낀다. 인간은 이중삼중으로 도구를 사용하면서 기쁨을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떠한 재화를 얻기 위해 인간은 시간과 노력과 금전을 투자한다. RPG 게임이 매력적인 것은 이러한 원리가 투영되기 때문이기도 한데, 파판12가 요구하는 투자는 기존의 파판 시리즈의 그것을 상회하는 양을 요구한다. 통상 4~50시간 언저리로 클리어할 수 있고 숨겨진 무기-숨겨진 보스-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서브 이벤트 등을 해결해도 100시간이면 차고도 넘쳤던 기존 시리즈들에 비해 파판12의 경우는 100시간은 우습게 넘고 개인차와 운(게임 중 무언가와 만나고 무언가를 얻는 확률)에 따라 200시간도 모자라는 경우가 속출하게 된다. 나는 제법 평범하게 120시간 언저리에서 끝냈지만... 그러나 위에 적었듯 그 시간을 투자하고 게임 속을 헤매어 다니는 것이 결코 괴롭지 않고 마다할 수도 없다는 것이 무섭다.
- 온라인이 아닌데도 느껴지는 생활감
온라인 RPG 게임들(히히히, 하흐하호흐, 훨흐호흐훠흐해흐흐 등)이 인기가 있는 것은 역시 게임 중에 만나는 인물들이 어딘가에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 타인, 인간이라는 점도 그 요인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파판12에서 겪을 수 있는 서브이벤트는 그 수도 많지만, 그 이벤트들을 해결하고 진행해 나가면서 관련된 주요한 인물들 외에도 주변인물, 정황 패턴 등이 계속해서 변화해 나간다. 그 속에서 게임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나간다는 느낌과 게임 속의 인물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던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의 기후 조건도 일정 시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게임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었다. 물론 노가다를 하다보면 어처구니 없는 기상 급변(이상 기후?)를 볼 수 있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논외로 하고.
- 매력적인 캐릭터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발매 직후부터 많은 논란이 있는 걸로 알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6명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개와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 좋았다. 간단히 열거해 보면...
1. 반 : 프롤로그에서 조작할 수 있는 캐릭터의 동생이자, 이 게임의 얼굴마담. 주인공이라고 하기에 그 역할이 미미하고 찌질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쾌활한 성격의 전향적인 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 반이 엄청나게 성장해서 이야기를 아우르고 이 게임 상의 모든 사건을 평정하는 인물이었다면 기동전사 건담 SEED 시리즈의 키라 보살과 같은 평가를 들었을 것이다. 개념이 부족하고 부딪혀서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한 전형적인 소년 캐릭터였다.
2. 판넬로 : 결론적으로 히로인 1. 반의 소꼽친구이자 6명의 주역 중 가장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존재감이 희박하다는 평가가 많긴 하지만, 반을 걱정하는 소꼽친구 소녀가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시전하는 인물이었다면 더 욕을 먹었을 것. 어찌보면 판넬로 또한 전형적인 주인공 소년의 파트너이자 소꼽친구 역할이었다.
3. 밧슈 : 개인적으로 막판에 가장 감동먹은 인물. 초반에는 고문당하고 누명쓰고 두들겨 맞고 배신당하고 온갖 고초를 겪는 인물이지만 충성심과 기사도, 그리고 신념으로 선택한 길을 걷는데 흔들림이 없었다. 게다가 동생의 잘못을 바로잡고 동생의 유언을 실천하는 멋진 형님이기까지. 기사도라고 하면 파판9의 맹목적인 깡통기사 슈타이너 아저씨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겠지만 다소 껄렁해 보이는 민소매+7부바지라는 복장이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멋진 캐릭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4. 아셰 : 아마도 이 게임이 발매되기 전 최고의 낚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싶은, 헐벗은 왕녀님. 명색이 여왕님인데 배꼽 다 드러내시고 똥꼬치마는 좀 아니시지 않나요... 게다가 초반에 공개된 일러스트로 반과의 로맨스를 연상한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전혀 그럴일이 없는 역할이기도. 반과는 다른 의미로 성장하고, 밧슈와는 다른 의미로 신념을 확립해 가지만 결국은 청상과부인 애처로운 왕녀님. 중반 쯤에 먼저 간 남편의 환상을 떨쳐내는 장면에서 감탄하고 엔딩에서 발프레아를 목놓아 부를 때 동인지를 떠올려버린...(막장이구나...) 아무튼, 파판 12의 또 다른 얼굴마담.
5. 발프레아 : 스스로 말하길 파판12의 주인공. 많은 역할을 했고, 파판12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이겨나가는 바람둥이의 이야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주인공일 수 있는 인물. 껄렁한 목소리와 건들거리는 품세가 인상적이면서도 밧슈와는 다른 의미로 강한 남성 캐릭터. 파판12라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정체성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낙점하는 경우가 많은, 임팩트 강한 캐릭터이다.
6. 프란 : GBA로 발매되었던 파이널 판타지 택틱스 어드밴스(길다...)에서 확립되었던 종족 비에라족(바니걸들이 아니었다..)의 여전사이신데, 비에라 족의 복식이 기본적으로 란제리룩이다 보니 참 눈 두기가 뭐한 캐릭터이다. 특히 필드를 뛰어갈때 카메라 워크가 파티 후방에서 잡을 경우 뛰어가는 뒷태가 참참참... 아셰랑 같이 뛰고 있으면 흐뭇하면서도 고마우면서도 민망하면서도... 암튼 그렇다. 중반까지는 그냥 파판10의 루루가 생각나는 쿨한 누님인가부다 싶다가, 막판에 이 게임 유일의 커플 부대원이라는 것을 커밍아웃하는 나이스바디 토끼 누님.
이 외에도 악역 1호 베인이나 작은 왕자 라사, 아나벨 가토-솔리드 스네이크-가루루 목소리의 오오츠카 아키오 씨가 연기한 떼쟁이 저지 가브라스 등등 놓치기 힘든 멋진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하여 즐거웠던 게임이었다.
단점없는 게임 없고 단점없는 파판도 없었지만, 역대 파판이 그러했듯 단점보다 장점이 압도적으로 많은 게임이었다. 또한 파판 2 이후로 이렇게 전멸을 많이 당해본 파판도 처음이었다. 개인적으로 꼽는 최대의 단점은 파판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숨겨진 최종보스의 난이도가 맷집에 기인한다는 점이라고 보는데, 이는 여타 온라인 MMORPG의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편집하여 접목시킨 파판12의 전투시스템 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터무니없는 HP로 인해 몇시간이고 전투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미스였다고 본다. 그 외에는 서브이벤트를 통해 파판12의 세계를 신나게 휘젓고 다녔던 120시간이라고 하겠다.
PS3로 발표된 파판13도 파판12 수준으로 나온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때는 엔딩만을 목표로 하게 될 것 같기는 하다. 재미있고 매력적인 RPG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장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게임은 점점 힘겨워진다는 것을 파판12클리어를 통해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RPG를 좋아하고, 일본어가 어느 정도 가능한 PS2 유저라면 지금이라도 충분히 즐겁게 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추천해 드리련다. 아직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PS2 최고의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PS2 최고의 RPG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