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공을 전공해서 무역회사의 사무직에 근무하는 사람치곤 좀 부끄러운 과거지만, 집에 제대로 활용하는 컴퓨터가 들어온 것은 2000년이었다. 물론 국민학교 5학년때 쯤 아버지께서 큰맘먹고 사주신 40메가짜리 하드가 붙어있는 흑백 AT가 있긴 했지만, 고등학교때 까지 한글 1.X 버전으로 간간히 팬픽 정도만 쓰는 (그나마도 하드가 사망하면서 모두 사라졌...) 용도로 썼고 그 성능이라는 것이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것이 동생의 일관계로 2000년도에 들여놓은 셀러론 덕분에 다시 키보드를 두들겨 간단한 글을 올리고 레포트를 쓰고 할 수 있게 이르렀다. 물론 지금은 동생 전용 놋북에 내가 80% 사용하고 있는 허접 데탑이 있긴 하지만.
지나간 세월의 허접한 컴터 사양 자랑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죙일 건프라를 하느라 굳은 몸을 우득우득 풀다가, 프습용 동영상 인코딩 때문에 데탑을 쓰지 못해 동생 놋북의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키감은 글쓰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 키보드를 예뻐해 주는 중이다. 한메타자교사의 베네치아 게임 스코어 경쟁 때문에 한타는 어느 정도 익혀둔 것이 중딩때이고, 고등학교때는 TRPG(규칙책과 주사위를 이용해 게임마스터가 설명하고 묘사하는 시나리오를 플레이어들이 풀어나가는 게임 방식)인 D&D(TRPG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게임. PC용 RPG 및 캡콤의 아케이드 게임 D&D 등이 유명하다.)를 하느라 죽어가는 AT를 활용하여 이런저런 문서들을 편집하고 쓰고 하던 시절에는 키감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기계식 키보드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확인할 수 없는 지금에서야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 키보드를 두들겨 장문을 적어내려간다는 작업과 키보드의 감촉하면 떠오르는 것은 군대시절 군의관님의 놋북(함헝의 제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을 두들겨 논문을 옮겨 적던 작업이다. 당시 손이 많이 굳어있던 나는 짬밥에 밀려 밤에 군의관님의 작업을 대신하게 되는 일이 꽤나 어려웠었다. 게다가 그 놋북의 키보드는 이상하리만치 키감이 나빴고 한참 원문을 보며 타이핑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줄이 어긋나버렸다거나 영타로 바뀌어 있다거나 해서 상당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더랬다. 나중에 부대에 썩어가는 486들을 되살려 스타 전용 PC방을 꾸미게 되면서 문서 작업이라는 것에 대한 적응은 좀 더 편하게 되어갔다.
잠깐 뜬금없는 소리를 하면, 언젠가 하루키씨에게 펜에서 키보드로 옮겨간 다음에 문장을 쓰는 것에 변화가 일지 않았냐는 질문이 있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가 출간될 즈음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하루키씨의 대답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과연 명장은 말을 탓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나는 키보드의 느낌에 꽤 많은 느낌의 차이를 받는 편이다. 놋북 키보드의 알 수 없는 얕은 탄력이 느껴질 때면 문장이 좀 더 리드미컬하게 나가는 느낌을 받아 글을 좀 더 막 쓰게 되는 듯하다. 반면 보통 회사에서 쓰는 마소 키보드는 그 특유의 시끄러움과 확실한 깊이 탓에 두어 문장을 쓰고 잠시 쉬게 되는 편이다. 물론 퇴고를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방금 쓴 문장이 많이 이상하지는 않나 한숨 쉬어가게 되든 느낌을 받게 된다. 또, 집의 키스킨이 있는 로지텍 키보드로 두들길 때는 조금 탄탄한 키스킨의 느낌 탓에 글을 길게 쓰는 자체가 물리적으로 좀 힘이 드는게 사실이다. 게다가 키스킨 특유의 소음도 조금은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고 말이지.
그러나 당황스러운 것은, 분명 키보드를 두들길 때는 저렇게 다른 느낌을 받으며 글을 적어 내려간다고 생각하는데, 결론적으로 나오는 결과물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쓰는 동안의 느낌이 가능한 쾌적한 편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내려가는 작업에 있어 키보드의 느낌이 절대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편한 키보드가 있으면 좀 더 키보드를 두들기는 맛이야 있겠지만, 글의 완성에 있어(완성도가 아니라 완성이다.)서는 결국 글을 쓰고자 하는 의욕을 넘어서는 영향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밤이다.
어째서 건프라 재밌게 해 놓고 이런 글을 지금 줄줄 적고 있는지 나도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적는 의욕이 있기에 퍼석한 키스킨을 씌우고서라도 다닥다닥 키보드를 두들기고있는 것일테지. 하지만 이 글에 대해서 만큼은 동생 놋북의 키감이 동기를 제공했으니 키감을 무시하고 살아가서는 안될 듯도 싶다. 이렇게 되면 봄에는 와이드 모니터를 질러야 하려나... 음음. 분명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