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생과방 안내판

경복궁. 3호선 전철역, 광화문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고궁, 외국인이 많이 온다, 근처에 청와대가 있다, 업무상 종종 지나만 가고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정도가 떠오르는 곳. 오래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시대 중앙청 건물을 활용해서 쓰던 시절에 들어가보고.. 거의 가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가까운 곳에 있어서 더 가 볼 생각을 안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경복궁에 이러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어, 평일 하루 시간을 내어 들러보았다. 

내가 앉은 자리는 이런 느낌
다과가 든 그릇과 포크 대신인 도구, 차의 이름표

시작 10분 전에는 도착해 달라고 하였는데, 경복궁을 관람목적으로는 사실상 처음 가보는데다 공사와 카카오지도를 너무 믿는 실수를 해버리는 바람에 시작 1분 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더워지기 시작한 5월이라, 자리를 안내받아 앉아서는 넓어진 이마의 땀을 연신 훔치며 차를 기다렸다. 위 사진과 같은 자리에 낮아, 예약할 때 주문한 대추인절미병 세트를 받아들고 옆에 준비된 부채를 부치며 차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저 상과 그릇과 포크대신인 꼬챙이(...)와 차이름표의 명칭도 모르고 있는 멍청한 아저씨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있다...

부채 덕분에 살았다
외국인을 위한 영어 팜플렛
영문판
이쪽은 한글판
내 선택은 이것
주악도 맛보고 싶다
주문가능한 차의 종류
이 프로그램의 취지

사실 이제껏, 경복궁이라는 장소는 그냥 조선시대 왕이 살던 궁전을 보존, 재현한 곳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외국인들이 한복을 빌려입고 K-드라마에서 본 장소들에서 관광객 기분을 내는 그런 장소 정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문화재를 보존하고 그 문화재를 관람하면서 당시의 어떠한 문화체험을 나름 고급지고 나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컨텐츠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러한 형태로 제공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위 사진의 팜플렛에도 나와있지만, 이 생과방 컨텐츠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즐기던 후식과 차를 재현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보면, 꽤나 고급진 컨텐츠가 아닐까. 예약하는데 초인적인 근성과 운이 따라야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주문한 사미다음을 오픈
옛날 약포를 닮았다.
차망에 넣어 차를 우린다. 대략 4~5분
한과 세트는 이렇게.
차를 다 우렸다

사미다음은 이 곳의 시그니쳐라고 해서 도전해 보았는데, 전설의 명의 허준 선생이 쓴 동의보감에도 올라있는 차...라던가. 아무튼 좁은 상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차를 우리고, 따뜻한 차를 따라서 음미해 보았다. 다른 분들의 리뷰에는 한약 맛이 난다고 했는데, 그런 향이 살짝 나고 그저 구수한 전통차 같은 느낌이었다. 뜨거운 물로 우려낸 차 이지만, 날이 더운 탓에 추가로 준비해 준 얼음 잔을 활용해서 중간부터는 시원하게 마셔보았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한과들은 대체로 달달했지만, 새콤한 맛의 과자도 있었고 구수한 차와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방에서 보이는 풍경
퇴실한 다른 방을 엿보았다
기회가 된다면 이쪽에서도...

생과방은 70분짜리 컨텐츠로, 사실 차가 차려지고 난 후에는 딱히 직원들이 뭘 하는 것도 없고 그저 고즈넉한 고궁의 방 한 켠에 앉아 차와 과자를 즐기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에어컨도 없는 고궁의 방에서 한과와 전통차를 즐기는 한가로운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매일 업무와 눈싸움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 그 자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은 책을 한 권 가져가, 차와 한과를 조금씩 먹고 마시면서 한바탕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전통악기로 편곡된 민요가 흐르는 조용한 궁전 작은 방에서의 짧은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잠시 손전화도 꺼놓고 그 정취를 느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날이 아주 좋았다
생과방 입구 풍경
수국이 멋진데.. 조화였다
광화문을 나서며

주어진 시간을 다 보내고, 다소 느즈막히 신을 신고 방을 뒤로 했다. 경복궁 안에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과 한국인 관광객들이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날은 맑고.. 다소 더웠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와야 했던지라 경복궁을 좀 둘러볼까도 싶었지만, 잠시 망중한을 즐겼던 만큼 다시 또 바쁘게 걸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지라 잰 걸음으로 광화문을 나섰다. 그렇게, 특별한 평일 하루의 한 꼭지를 이렇게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 다음에 또 기회가...있으려나.

-생과방 다녀오며 알아두면 좋겠다 싶은 것들
= 광화문으로 들어가거나 궁 안으로 가지 말고 경복궁 오른쪽 큰길을 쭉 올라가, 국립민속박물관 입구로 가는게 편하다.
= 마찬가지로 경복궁 입장권도 여기서 끊을 수 있다. 미리 끊는다고 광화문 근처에서 줄서지 말자. (2024년 5월 기준)
= 10분전에는 도착하도록 해달라고 되어 있지만, 1분전에 도착해도 입장은 가능하다. 입장은...
= 본인 이름으로 예약하지 않은 경우, 예약자의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를 반드시 챙겨야 한다. 안그러면...
= 예약이 매우 힘들지만, 평일 낮시간에 의외로 취소표가 발생할 수 있다. 혼자 간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