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점심을 먹으려고 사옥을 나서다, 쌀쌀한 바람에 다시 들어가서 회사 잠바를 걸치고 나왔다. 회사 잠바는 걸치는 순간 겉보기 등급 +20을 해버리는 무서운 아이템. 그러거나말거나 공돌이들이 즐비한 이 동네 점심시간에는 흔하디 흔한 훼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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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으로 짜장이 맛나게 된 볶음밥을 먹고 30분도 안되어 끝난 점심 식사에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미친듯이 푸르른 가을 하늘과, 이제야 지금이 9월 하순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황급히 추워진 공기에 미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한살한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싫어지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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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우리 어머니는 이따금 나를 내새끼,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신다. 강아지라고 보기엔 너무나 늙어버린 지금이지만, 라이브로 지인들에게 들려주긴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안도감이 든다. 태어나서 30번째 맞이하는 이 가을에 볶음밥 잘 먹고 입안에 남아있는 양파와 춘장의 냄새를 커피 한 잔으로 지워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래도 아직 기댈 수 있는 구석, 비빌 언덕, 돌아갈 집,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구나 하는, 그런 안도감을 느꼈다.

 킨키의 츠요시, 토키오의 고쿠분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 판타스티포는 지독히 재미없는 영화였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 중의 하나가, 이제 어른이 된 게 아닐까 하는 토라지(고쿠분)을 비웃는 주변 친구들. 나잇값을 해야하고, 이제 좀 남자답게 살아야 하고, 슬슬 현실적으로 신부감을 찾아봐야 하는 나이라는 주변의 이야기와 평가.... 아직 배가 부르고 아쉬울게 없는 강아지 같은(차마 개X끼라고는...)이기에 귓등으로 흘리고 좋을대로 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분명 비웃음을 사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 마에스트로(김명민)을 보고 있으면 슬슬 자신의 직업에 진지하게 프로의식을 가지고 완벽을 추구한 결과,  미친 듯이 까칠하게 굴면서 실력으로 깔아뭉개도 반항하지 못하게 하는 인간이 되어 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늘이 퍼렇다 보니 공기가 차갑고, 가을을 의식해 보니 또 능숙하게 가을의 파도를 크롤로 올라탄 것이 느껴진다. 가을이구나. 남자의 계절, 외로운 계절, 살찌는 계절, 활자가 땡기는 계절, 가을이구나. 이제 또 눈이 오는 계절이 되면 강아지처럼 뛰어놀겠지. 일단 이번 주말에는 마당에 앉아서 뭔가 해 봐야겠다. 강아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