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무라카미 하루키. 18살 고3때 그를 알게 된 후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던가. 고3인 나이에 새롭게 일빠병+중2병+덕후중독을 앓으며, 맥주와 위스키와 스파게티의 맛도 모르면서 막연히 그리워하며 단숨에 그의 작품들을 섭렵하며 나 스스로의 의식을 그의 영향으로 채워나갔던가. 최근에 다시 양을 쫓는 모험을 정독하면서 그 결말이 그리도 슬픈 결말이었던가 하고 바다를 메우느라 얼마 남지 않은 모래사장을 찾아가서 울었던 '나'의 마음을 흉내내며 속으로 소리죽여 울어보았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나'는 30살이다. 작중 묘사에 의하면 몇 개월 후면 서른이 된다고 하지만, 우리나이로 치면 서른, 몇 개월 후면 서른하나가 되는 나이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 나이와 비슷하다. 나는 약 12년쯤 전에 고3때 읽었던 소설을 실로 12년만에 다시 처음부터 정독하면서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로 작품을 즐겨 보았던 것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독서였지만... 아니, 텍스트 파일을 전화기에 집어넣어 읽었으니 독서라기엔 무리가 있지만. 오해가 있을 까봐 변명해 두자면, 나는 이미 양을 쫓는 모험을 비롯한 하루키씨의 소설 번역본은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무게와 부피 때문에 텍스트 파일로 다시 한 번 읽어보았을 뿐. 뭐 아무튼.

 어쩌다 약속도 비고 지갑도 빈 주말, 냉장고에 들어앉아있던 스파게티 소스와 다른 재료들을 볶고 끓이고 삶아 스파게티를 만들고, 스파게티 국수를 삶고, 맥주와 프링글스와 스파게티를 마시고 먹었다.  어쩐지 하루키적인 삶이다. 한동안 집에서 만든 요리라고는 라면과 볶음밥 뿐이었는데, 얼마전부터는 또 뭔가 실험적인 짓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요리고 내가 먹어치울 뿐이지만 그럭저럭 먹어줄만은 하다. 적어도 탈도 나지 않고.

 내가 개인적으로 꼽는 하루키씨 최고의 작품은 청춘3부작의 완결편인 댄스 댄스 댄스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노르웨이의 숲이나, 하루키씨 최장편 태엽감는 새 연대기나, 밀레니엄 이후 최고 작품 해변의 카프카도 있지만 누가 뭐래도 내 20대 초반을 지배했던 작품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인생 최고의 소설은 댄스 댄스 댄스다. 잘난 듯이 키보드를 두들기고는 있지만 댄스 댄스 댄스를 마지막으로 정독한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작년보다는 더 전인 것 같은데.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위대한 게츠비를 그렇게 대했듯, 머리맡에 두고 뽑아내어 아무곳이나 펼쳐서 한바탕 읽어내려가고-시간이 허락한다면 거기서부터 끝까지 읽어버렸던, 그런 작품이 내게는 댄스 댄스 댄스 였기에 오히려 1권 첫페이지부터 정독하는 일은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전작에 해당하는 양을 쫓는 모험은 내게서 의외로 거리가 있는 작품이었다. 청춘 3부작을 관통하는 작품이자 댄스 댄스 댄스의 전작. 딱 그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나 보다. 키키의 존재와 양사나이, 양박사, 이루카-돌고래-돌핀 호텔, 쥐, 양, '나'. 그 무대 해설의 작품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나보다. 실로 '나'같은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느꼈다. 그리고 다분히 하루키적인-거기에 건프라와 포스팅은 빼야겠지만-주말에 스파게티를 씹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저녁에 중2병이 도진 탓도 있겠지만. 도대체 30이 넘어도 중2병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윈앰프는 마침 미스터 칠드런의 쿠루미를 연주한다. 상실, 성찰, 희망, 슬픔. 다시는 다가가서도 안되고 다가갈 수 없는 것을 뒤로 하고서 그리움에 희망과 다짐을 던지며 슬픔을 토해내는 노래. 내일 아침 냉정한 머리로 보면 실소를 자아낼 것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약간의 맥주가 머리에 전한 약간의 취기와 함께 키보드를 두들기게 만들고 있다. '나'는 멋진 귀를 가진 그녀가 여러가지를 찾아내어 주고 이끌어 주고 기다려 주는 동안에도 그저 양을 생각하고 셜록홈즈를 생각하고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잤다. 내 인생도 그다지 다를 바 없이 굴러가고 있다. 내 주변에 널린 멋진 귀를, 멋진 뇌를, 멋진 코를, 멋진 눈을, 멋진 목소리를, 멋진 몸집을 가진 사람들이 머물러 주고 있는데도 난 그걸 당연히여기고 문제 있는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떠올린다.

...지난주에 걸려온 몇 통의 전화와 몇 개의 문자에 나는 그냥 다음주 쯤 보자는 상투적인 답변을 남겼더랬다. 그러고보니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꼬리를 엮어본지가 언제였더라... '나'의 바다와 방파제는 메워졌지만 울 수 있는 모래사장은 남아있었다. 돌아갈 고향집이 없어진 나는 돌아갈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을 위해서 뭔가 남겨나가야 하지 않을까.... 검은 옷의 남자가 쫓으라고 지시하고 나를 빙빙 돌리기 전에 내가 좀 알아서 말이지.

새삼, 모두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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