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대충 고삐리 때 즈음에. 에세이 따위는 개똥철학에 다름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국어 또는 문학시간에 시험문제로 연결되는 수필들을 제외하면 유명 작가의 수필을 가능한 멀리하려고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봐야 접할 수 있는 글들이 그리 많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내 나름의 발버둥 같은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웹툰이라는 플랫폼이 출발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 언젠가 독창적인 세계관과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없이 개인의 일상을 웃음과 함께 섞어 극화체와는 거리가 먼 가벼운 그림과 함께 파는 작가들을 함량미달이라 비난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일상을 소재로 한 가볍지만 공감이 가는 장르의 웹툰을 즐겨 읽고 있긴 하지만


표지

등짝

대충 40년 좀 넘게 세상을 살다보니, 사람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지만 그 와중에 누구나 '내가' 사는 일상이 특별하고 힘들고 어렵고 지친다고 생각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주변에서 부모님들 중 한 분 혹은 두 분 모두 작고하시는 경우도 보게 되고, 나 또한 양친 중 한 분은 투병 중이신 삶을 살고 있다. 요 몇 년 간 가끔은, 내가 고아가 되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대만출신 그림작가 가오옌의 그림들이 상당수 곁들여져 있다.

이 책은 한없이 개인적인 부분들 중에서도 핀포인트로 개인적인 조각들을 끄집어 내어 위트 가득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에세이와는 완전히 다른, 짧은 자서전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는 개인사에 대한 정리라고 생각한다. 맥주와 위스키를 좋아하고, 청년시절에 재즈바를 경영하였으며, 전공투를 지켜봐왔고, 마라톤을 즐기며, 고양이를 사랑하고 레코드를 수집하는 괴짜 작가가 술술 풀어내는 편안하고 위트있는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가족사를 통해 근대 일본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그런 에세이가 이 책이다.

장편소설 [기사대장 죽이기]나, 역시 장편소설 [태엽감는 새] 등에서 보여지는 2차대전 일본군에 대한 하루키 특유의 시각과 입장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게 되는 한 권이다.

나 자신의 가족사도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서 타인의 가족사를 들여다 보는 기분은 뭔가 묘한 기분이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러 가게 된 사건이 머릿속 한 구석에 오래도록-적어도 50년 정도?-남아 있다가 결국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작가 본인의 세계관, 그리고 그 추억들을 담담하게 풀어낸 그런 한 권이었다. 

처음 책을 받아보았을 때는 표지와 크기, 훌훌 넘겨보았을 때의 구성을 보고 어째서..?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책을 덮으면서는 묵직한 울림이 남았다. 물론 하루키 아저씨의 팬이 아니라면 이 책을 선택할 가능성이 낮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글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