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수능시험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알아버렸다.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친구의 꼬드김에 솔깃해서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것이 패착이었다.

나는 대단한 문호를 알게 되었다는 설득으로 어머니의 지갑을 열어, 구할 수 있는 모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구했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서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살았다.

대학에 가서 여자를 알고, 여자와 함께 스파게티를 삶으면서 머릿속 어딘가에서 울리던 구절들은 모조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속의 문장이고, 단어고, 묘사였다.

군대에 가서 여자가 떠나고, 스스로 스파게티를 삶는 일도 없어졌다. 스파게티도 요리고, 요리는 만든다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나는 어쨌거나 스파게티를 삶는다.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국수를 가늠하여 끓는 물에 투입하는 그 순간도 스파게티를 삶는 순간이고, 팬에 기름을 두르고 재료를 차례차례 볶고 소스를 첨가해서 보골거릴때까지 볶는 그 순간도 나는 스파게티를 삶고 있는 것이다.

마른 날씨에, 하늘이 파랗다. 파란날 내가 삶아 재꼈던 스파게티 소스를 모조리 하늘에 바르면 하늘이 붉어질 수 있을까 하는, 참으로 시덥잖은 상상을 해본다.

이제는 스스로 스파게티를 삶지 않고, 마늘빵도 굽지 않지만, 그저 누군가와 함께 남이 삶아주는 스파게티를 그저 먹으러 다닐 뿐이지만, 하늘이 파란날은 스파게티 국물을 하늘에 끼얹어 버리고 싶은 날들이 있다. 앞으로 세상에 얼만큼의 스파게티가 삶아지길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시퍼런 하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은 못 견디게 하루키의 책을 손에 잡고 싶어진다.

나는 와타나베가 아니고, 나가사와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태엽감는 새도 아니다.

그냥, 하루키 월드를 구경하는 그 무언가, 그저 '우리들'이기만 하면 된다.

...스파게티를.. 삶고 싶다. 어째서 하루키는 나에게 스파게티를 가르쳤을까?

- 2005.01.11. 어느 하루키 카페에 적었던 글의 재탕. 팔은 아프고, 하늘은 파랗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