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다 지나가고 내리는 비가 겨울비로 느껴질 만큼 쌀쌀한 공기가 지나가는 오늘, 문득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깊은 가을의 속담이 떠오른다. 벼의 낟알이 들어찰 수록 그 알찬 무게 때문에 아래로 처지는 벼의 모양을 보고, 우리 옛 선조들은 겸손의 미덕을 떠올렸다고 한다.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말이 있다. 뭐, 살아오면서 본능적으로 나대기 좋아하는 인간들을 보면 오죽 했으면 저런 말이 나왔을까 싶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매너 좋은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녀 보면, 겸손함과 공손함이 공존하는 곳들을 많이 보게 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모티콘도 거의 쓰지 않는 내게는 그런 게시판들의 조용조용한 분위기가 좋다. 예전만큼 통신체와이모티콘을 혐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는 쪽 보다는 없는 쪽이 글 읽기도 수월하고 보기도 좋다. 그리고 그런 게시판에서 그 게시판의 테마 분야에 실력있는 사람의 겸손함을 보게 되면 진심으로 부럽고 또 경외심이 인다. 비단 인터넷의 게시판만 그럴까. 어디를 가든,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 현실에서건 인터넷에서건 간에 무능한 자의 처세술로 둔갑한 겸손을 접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가끔이 아니라 매우 자주. 나도 결국 어느 정도는 그런 가짜 겸손을 떨고는 있지만, 그래도 솔직한 무능의 고백을 하려고 노력하고는 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지만, 내가 그렇듯 다른 사람들 역시... 실력있는 자의 낮은 자세가 아닌 정말 무능한 자의 변질된 처세술을 접하게 되면 역시 기분이 나빠지게 된다. 말투는 공손하지만, 접하는 것 만으로 기분나빠지는 그런 자세. 세상에는 분명 그런 자들이 있다. 알면 알 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는 종자들.
이야기를 바꿔서, 나도 아직은 20대지만 요즘 내 막내 동생뻘(내 막내동생은 연년생이지만.. 새겨 들으시라.)되는 친구들에게 느끼는 점은 뭐니뭐니해도 자신감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당당함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실로 부럽다. 젊다 못해 어리기 때문에 튀어나오는 돌출 행동 조차도 -그것이 치기이건 객기이건 간에- 당당하다 못해 당돌한 자신감이 차있는 것을 느낄 때가 있어 부러울 때가 있다. 그것이 설령 실수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뭐 어떤가. 젊은데. 배워나가는 과정인데.
그러나 가끔, 실력있는 자의 당당한 자세가 아닌 찌질이들의 허세를 접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가끔이 아니라 매우 자주. 특히나 인터넷에서는 더더욱. 마치 [우리 애 기살려줘야 한다]는 부모의 전형적인 자식으로 자란 것처럼천방지축에 개념상실을 온 몸으로 표현해 내는 아해들을 볼 때마다 슬며시 화가 치미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럴때는 정말 이 나라의 폐단인 [나이를 앞세워서라도 찍어누르기 신공]이라도 발휘하고 싶어질 때가 있어 짜증이 난다. 스트레스를 참으면 속병이 된다던데, 펠정승 말대로 인터넷을 떠나야 할까나.
인터넷.. 그리고 블로그를 하다 보면 생판 모르는 남의 블로그를 들어가게 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훈훈한 정보를 접하고 감사의 덧글을 남기고 오거나 트랙백을 쏠 때도 있지만, 이따금은 도대체 이 인간은 뭘 생각하고 이렇게 당당한걸까.. 싶을 때가 있다. 문장은 담담한 듯 공손한 듯 하지만 내용은 담겨있질 않고, 조금 과거의 로그를 뒤적거리다 보면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정작 하고 있는게 없는] 우리네 백조-백수들의 전형을 볼 때가 많다. 무슨 놈의 여행과 공부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잔뜩 퍼와서 나열해 놓고 욕구불만만 잔뜩 토로해 놓은 주제에 조금 시간이 지나면 뒹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일기만 잔뜩. 이래서 고령화 사회먹여 살리겠냐고. 에휴.
무능한 자가 소리를 지르면 찌질해 보이고, 움츠려 들면 만만해 보인다. 실력있는 자의 당당함을 찌질하게 보고 능력있는 자의 겸손함을 깔보면 결국 [마음의 상처&물리적 상실]을 초래할 뿐이다. 일본의 음유시인 5인조 스맵의 에 따르면 사람은 본디 세상에 하나뿐인 꽃인지라, 누구나 대단해 질 수 있고 또 누구나 자신만의 재능을 꽃 피울 수 있지만, 아무래도 꽃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과 허언만을 나불거리는 입만 살아있는 것 같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잔인한 것이고 무엇이 참혹하고 어디가 시궁창인지 체험해 본 적도 없고 바라볼 용기도 없는 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