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라고 했지?" “18시..면 몇 시야?” “여섯시. 그런 것도 모르냐?” “지는 언제부터 알았다구..” “남자는 군대 갔다오면 다 알어. 모르는 게 이상한거지.” “...마초..” “에에?”
버스가 몇 시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시간에 민감한 성격 탓에, 짐을 챙기는 시간에 쫓기는 그녀의 자취방에 찾아가 가방을 챙겨주고, 늦은 점심을 터미널에서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터미널의 맛없는 식당에서 늦은 식사를 깨작거리고 소파만이 쓸만한 커피숍에 앉아 묘하게 끊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꺼낸 말이 반가워서 되물어 보았을 것이다. 이제 조금 뒤면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될 그녀를 앞에 두고, 나는 이상하게 틱틱거리고만 있다. 다 마셔버린 코코아잔을 괜시리 들었다가 내려놓고, 그녀 혼자 어떻게 내려서 움직일지 암담하기만 한 가방을 바라보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아마도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복잡한 심정이리라.
“좀 걸을까?” “가방...” "내가 들면 되지. 이리 줘."
호기를 부렸지만 가방의 무게는 만만치 않고, 크기도 작지 않다. 혼자 사는 작은 자취방의 짐들을 최대한 택배로 보냈다고 했는데도 짐이 이렇게 많은 건 무슨 조활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가방을 들쳐메는 틈에, 그녀는 재빨리 음료의 계산을 치른다. 어차피 가는 길인데 노자에나 보탤 일이지. 가방을 메고 커피숍 밖으로 나와, 승강장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아직 30분 이상 시간이 남아있으니 조금 더 돌아다니는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멍하니 앉아서 마주봐고 있어야 괜히 기분만 가라앉을 뿐. 30분이 지나면 그녀는 버스에 올라 일단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의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 친척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예정으로. 아직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나를 알려주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은데... 그런 안타까움만이 가슴속을 지나 머리 속까지 빙빙 돌고 있다. 몇 걸음 앞에 놓인 음식점 간판을 괜시리 발로 툭 건드려 보지만, 의미없는 행동은 빙빙 도는 안타까움을 세우는 의미가 되지 못한다. 나도 참 바보다. 차라리 지금 안타까운 마음을 솔직하게 내비치고 엉엉 울어버리면 차라리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녀의 유학 이야기가 나온 후로 언제부턴지 모르게 솔직하게 마음을 말하지 못한다. 괜히 말을 툭툭 내뱉고, 쓸데없는 곳에서 정곡을 찌르고. 그녀도 역시 그렇게 나를 대하고 그러는 가운데 아픈 마음에 자잘한 상처들이 더해져 왔을 뿐. 그 마음은 자존심일까, 덜 자란 어리광일까. 어느 쪽이건.. 나도 그녀도 바보다. 솔직하지 못한, 뻔한 거짓을 반복하는 두 바보. 터미널 외곽을 한바퀴 돌자, 다시 승강장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나온다. 지금 당장 한마디라도 더 기분 좋은 말을 해주면, 들으면 좋을 것을...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발은 터벅터벅 승강장을 향하고, 출구 쪽의 문 위에 걸린 시계는 버스가 승강장에 곧 도착할 것을 알린다. 그 버스는 이제 그녀를 데리러 와서, 그 뒤엔 내가 알 수 없을 내일로 그녀를 실어갈 것이다. 지금 나는, 솔직히 말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는 그녀에게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바보같은 생각인 줄은 알지만... 버스야, 안 오면 안 될까? 난 그녀를 너무너무 사랑한단 말야...
“저기..” “앙?” “한 바퀴 더 돌거야? 이제 슬슬 타야 해..” “어? 응... 응.” 기회는 지금 뿐이다. 무의식 중에 터미널을 한바퀴 더 돌려는 발걸음을 불러세운 그녀와 함께 승강장으로 향하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그녀에게 무언가 한마디를 제대로 건넬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고 있어도 말은 나가지 않는다. 어떤 진지한 말을 조금 꺼내려고 하면 그 순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그러기는 싫은 자존심 한조각 때문에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고 조용히 승강장으로 향한다. 승강장에는 그리 길지 않은 줄이 서 있어서 줄 뒤에 가서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가 들어온다. 어디선가 푹 쉬고 온 듯한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승강장에 들어와서는 정확한 위치에 버스가 선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버스기사가 내려와 짐 칸을 열어주고, 푸근한 인상의 검표원이 문 옆에 다가와 사람들의 표를 검사하기 시작한다. 나는 혼자서 짐칸으로 다가가,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짐칸에 넣는다. 그녀는 과연 이걸 어떻게 내려서 가지고 갈까? 가방을 넣고 뒤돌아보니, 그녀의 바로 앞에 서있던 사람과 검표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가까이 가니 표가 잘못된 듯, 결국 앞 사람이 표를 착각하여 이쪽으로 온 것 같다. 앞사람은 멋쩍게 표를 들고 다른 승강장으로 걸어가고, 앞사람 탓인지 검표원은 그녀의 표를 유심히 들여다 본다. 나는 왠지 그녀 곁에 바짝 붙어서지 못하고, 두어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검표원이 표를 들여다보고, 표를 반으로 찢어 반쪽을 그녀에게 돌려주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리게만 느껴진다. 표를 받고 버스에 올라타다가 문득 그녀는 내쪽을 돌아보며 생긋 웃는다. 아니, 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 나는 지금 변변한 작별인사라도 건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어느새 늘어선 줄 탓에 그녀는 다시 내려오지도 못하고 창가의 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그리고 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나를 바라본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며 닿지 않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웃는 얼굴로 보여주고 싶어 그녀와 지냈던 즐거웠던 추억들을 열심히 떠올려 보지만, 그럴 수록 내 얼굴은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울상이 되어간다. 손목이 피곤할 만치 손을 흔들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검표원이 나를 부른다. 차가 출발하면 위험하니까 승강장으로 올라오란다. 싫은 걸음으로 승강장으로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는 문을 닫고,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조금 멀어진 그녀가 조금전의 나처럼 손을 열심히 흔들어 준다. 나도 그런 그녀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지만, 버스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조금씩 멀어져간다. 능숙한 후진으로 버스가 방향을 잡자, 이윽고 버스는 앞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마치 버스가 아닌 배 같은 느낌으로. 손을 흔드는 그녀가 비치는 창문이 급격히 작아져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왠지 맥이 풀려 승강장의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숨을 쉬고 있자니 점점 기운이 빠진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다른 곳에 가는 버스가 같은 승강장에 들어오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터미널을 빠져나간다. 왠지 연결되어 있는 지하철을 타기가 싫어, 거리를 조금 걷고 싶은 기분이 된다. 터미널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왔다. 빠르게 달려나가는 자동차들과 다른 걸음으로 걷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길 양편으로 늘어선 커다란 건물들 속에서 나는 새삼 이제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원래부터 외톨이였는데, 그런건 당연했고 또 익숙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건, 왜 눈물이 멈추지를 않느냐는 사실이다. 길거리에서 창피하게. 무성의한 움직임으로 눈물을 훔치고, 문득 거리를 보자 조금 뿌연 시야에 행선지는 다르지만 그녀가 타고간 버스와 같은 회사의 버스가 지나간다. 괜시리 그 버스의 꼬리에 아까 그녀에게 하지 못한 인사가 하고 싶다는 청승맞은 생각이 들었을 때, 주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문자메세지다. 폴더를 열고 비밀번호를 누르자 그녀가 보낸 작별인사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뿌옇게 된 시야를 애써 훔치고, 그녀에게 답문을 보낸다.
[잘가,다시만나고다시너를웃으며보낼때까지나여기그대로있을께.잘가.]
포크같은 느낌의 곡을 부르는 남성2인조 유즈의 좀 오래된 곡으로, 흥겨운 리듬과는 달리 조금 어린 느낌의 이별을 담고 있는 노래다. 가사가 워낙 직설적이라 이야기를 만들기 쉬워서 끄적거려 보았다. 한때 이 노래를 참 좋아했었는데, 유즈의 목소리가 조금 높은 편인데다 원래 듀엣곡이라 노래방에서 만족스럽게 불러본 적이 없다. 그러고보니 노래방 가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