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내 정서와는 상관없이 로보트 태권브이를 기억하고 있다면 노땅이 되어버린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주 쯤인가 개봉한 로보트 태권브이는 1976년 첫 작품의 개선판이라고 한다. 76년...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물론 내가 기억하고 있는 태권브이는 82년의 수퍼태권브이와 84년의 84태권브이가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을 기억하고 있는 세대들에게 있어 그 디자인은 완전히 애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퍼와 84는 각각 전투메카 서펑클자붕글과 다이아트론(크론?)의 디자인 표절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의 영웅 중 하나였던 로보트가 일본산 로보트의 표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은 보통 충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태권브이가 가지고 있는 원죄와, 그 시절을 모르는 지금 아니메 팬들의 맹비난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극장에 걸린 것은 76년도의 원판이다. 굳이 따지자면 마징가 제트의 표절이라고 매도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76년판 태권브이는 표절 논란의 타겟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호버파일더와 동체의 디자인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 디자인된 시기가 시기인 만큼 어느 정도의 면죄부는 주어지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일본에서 태어난 수많은 로보트 디자인들도 마징가 제트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례가 많은 만큼... 물론 그런 로보트 만화영화들이 태어나고 메카 디자인이 진화하기 시작한 80년대의 수퍼와 84까지 옹호하기는 어렵다고 보지만.
아직도 로보트라면 눈길이 쏠리는 사람으로서 이번 로보트 태권브이 극장 재개봉을 바라보는 시각은 2가지. 하나는 이건 추억 마케팅이고 단발성일 것이라는 아쉬움 섞인 시각이다. 실제로 76년판 태권브이를 현역 어린이의 눈으로 본 지금 아저씨들이 아이들과 함께 극장을 찾은 비율이 제법 높다고 하니 기획의도는 대성공이라고 하겠지만, 아무래도 국내 만화영화 시장의 상황과 대한민국의 만화영화에 대한 인식을 볼 때 더 이상의 어떤 발전을 기대하기는 많이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고.
두번째 시각은 만약 이 태권브이가 앞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면... 하는 희망찬 시각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잡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G 이후의 건담처럼 태권브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전작과 별개의 메카와 세계관을 가지고 신작들을 만들어 주어도 괜찮을 것 같고, 겟타 로보나 마징카이저처럼 극적인 진화를 이루는 신 메카가 나와줘도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정말이지 우리 것이라고 내새울 수 있는 것을 잔뜩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로보트가 되어 줬으면 좋겠다. 아예 양산형 태권브이라던가 다른 국산 로봇들(은 완전히 디자인을 바꿔서 이름만 가져와야겠지만)과의 콤비 플레이를 보여줘도 괜찮지 싶다.
양산형 태권브이를 만든다면... 그 우수한 전투능력을 참고하여 소형화한 태권브이가 군용으로 제식 채용되고, 거대한 태권브이는 박물관에 들어가 있다가 강대한 적군의 침략에 의해 깨어난다는 어디선가 본듯한 설정을 뒤튼 리얼밀리터리 드라마같은 느낌으로 만들고...
태권브이 외전 깡통로봇 이야기... 이를테면 모양과는 달리 의외로 우수한 성능의 깡통로봇 수츠를 이용해 학원 폭력이나 기타 치안에 협력하던 깡통로봇이 사춘기를 맞아 우스꽝스러운 수츠를 벗어던지고 태권도를 연마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강해지다가 한계에 부딪혀 새롭고 멋진디자인의 깡통로봇(이름은..음..) 수츠를 입게 되어 태권브이의 싸움에 보다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되는 12화 1쿨 짜리 TV 판을 만들어 본다던가...
이번 태권브이 재개봉에 힘입어 우뢰매와 합친 세계관으로 만들어도 재밌을 듯 하다. 새로운 적의 강대한 힘 앞에 실력의 한계를 느낀 훈이가 마루치아라치를 찾아간 사이에 지구의 위기를 보다 못해 지구에 잠시 돌아온 에스퍼맨과 데일리가 우뢰매를 이용해(절대 실사 합성이 아닌 높은 퀄리티의 애니메이션 혹은 CG로) 상대하다가 우뢰매의 위기에 때맞춰 돌아온 새로운(혹은 신기능-실력을 탑재한) 태권브이가 우뢰매와 힘을 합쳐 물리치는 내용이라던가...
또는, 로보트군단과 메카3에 태권브이를 믹스하고, 표절로봇 대잔치였던 로보트 군단(쏠라원.투.드리이, 혹성로보트선더A, 스페이스 간담V... 피닉스킹이 여기 들어가던가..) 이름만 그대로 두고(스페이스 간담V만큼은 이름도 바꾸거나 없애야 겠지만) 디자인을 완전히 새롭게 다시 해서 대한민국 수퍼로봇 제네레이션 비스무리한 걸 만들어 본다던가... 하면 어떨까 싶다. 표절로 얼룩진 서글픈 과거라고는 하지만 한 때 방학마다 개봉하며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던 극장판 로보트 만화영화를 이렇게 그냥 잊어버리고 싶지만은 않기 때문에...
뭐, 이런 글을 주저리주저리 써 놓는다고 해서 개인적인 희망사항이 이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건담보다도 설레이는 이름인 태권브이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뭐, 그냥저냥 시류에 영합한 망상 한사발이라고 생각해 주시길. 지금 생각하면 군가 같기도 한 태권브이의 주제가가,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