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kishen의 기억 제4막 - 색선희준 블로그

띠지를 두른 표지
띠지를 두른 등짝

대충 고3때였나, 대학 새내기때였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작품에 빠져 당시 국내에 나와있던 번역본들을 닥치는대로 섭렵하던 시기가 있었다. 요즘 같았으면 지역 도서관 열람실에서 그 책들을 찾아보았겠지만, 집과 학교와 오락실 밖에 모르던 당시의 나는 그냥 책을 사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90년대 후반, 하루키 아저씨의 작품을 찾아 읽으며 하루키 월드를 알았고, 양사나이와 돌핀 호텔을 알았고, 야미구로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알았다. 당시 20대 시절에는 최고의 작품을 '댄스 댄스 댄스'라고 생각했는데, 유독 그 엔딩이 가리키는 방향이 신경쓰여 마음 한 켠에 물음표를 품게 만들었던 작품이라면 '일각수의 꿈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꼽을 수 있겠다. 그리고, 여기 그 후속작이라기엔 뭐하고 같은 세계관과 설정을 공유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 2023년에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제목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街とその不確かな壁

띠지를 벗긴 표지
커버를 벗긴 속표지

- 표지 디자인은 다소 맘에 들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이 무라카미 하루키인가? 덕분에 등짝은 보지도 않았는데, 덕분에 보다 더욱 작품에 빠져들기 좋았다.
- 많은 하루키 아저씨의 작품이 그렇듯, 이 이야기는 연애 소설인 것처럼 시작한다.
- 드물게 작가 후기가 있는데, 후기에서 밝히듯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원작이 되는 단편을 다시 만든 장편 소설이다. 하루키 아저씨의 과거 수필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 중 '모두 함께 지도를 그리자'에서도 언급되었던 내용.
- 크게 3부로 나뉘어져 있고, 숫자로 구분된 짧은 챕터로 다시 나뉘어져 있다. 덕분에, 시간을 들여 읽고자 해도 수월할 것 같다.
- 1부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챕터2~3 쯤에서 이..이거!! 하게 되었다.
- 37세의 남성 주인공이 많았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45세의 독신 남성이 주인공. 어쨌건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인간이란는 점은 동일.
- 오랫만에,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16세의 그녀도, Z**시의 카페 여주인도 이름이 없다. 
- 3부의 전개는 다소 당황스럽지만, 2부의 엔딩과 3부의 엔딩을 통해서 결국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계산사는 잠에서 제대로 깨어났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대충 25년의 세월을 지나 오랫동안 안고 있던 물음표 하나를 지울 수 있게 되었다.
- 나만의 세계를 상상하여 만들고, 그 세계에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찾고, 누군가와 세계를 공유하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닐까. 때로는 가고 싶은 세계를 안고 있던 사람은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나의 등을 밀어주기도 하고. 정말로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루키 아저씨의 글이 종종 그렇듯, 길고 자세한 문장을 종종걸음으로 읽어내려가다 보면 이야기가 멀리 진행되어 있는 경험을 이번에도 하게 되었다. 사실 원서를 발매 직후 구매해 놓고 읽지 않다가, 번역본을 2023년 추석 연휴를 빌려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하루키 아저씨의 또 다른 장편을 몇 권 더 읽어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당신과 나의 불완전한 벽이 너무 희번덕거리지 않기를 바라며.